농부 시인 서정홍의 생명이야기 상세정보
농부 시인 서정홍의 생명이야기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14/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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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시인이 들려주는 생명이야기
 
 
 
농부, 이 시대의 성직
 
제가 사는 산골 나무실 마을은 열 집이며 그 가운데 네 집은 혼자 사는 집입니다. 30년 전만 해도 서른 집이 넘었다고 하며 인구도 100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마을 어르신들은 지금 마을 전체 인구가 옛날에 한 집 수도 안 된다며 안타까워합니다. 제가 나무실 마을에 들어온 지 10년 남짓 되었습니다. 그동안 방아실 할아버지, 우동 할아버지, 금동 할머니, 인동 할머니, 팽기 할아버지, 설매실 할아버지가 흙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며칠 전에 여든 살인 덕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한평생 흙을 일구며 농사를 지으시다 흙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이분들은 대부분 번드레한 명함 한 번 만들지 못하시고, 가까운 외국 여행 한 번 못 가시고, 수백 억 들여 만들었다고 자랑해대는 영화 한 번 못 보시고, 그렇게 편리하다고 떠들어대는 스마트폰이나 컴퓨터 한 번 만져보지 못하시고, 모두 다 버리고 떠난 고향 땅을 지키며 사시다 돌아가셨습니다.
며칠 전에 돌아가신 덕촌 어르신은 돌아가시기 한 달 전쯤에 제게 찾아와 말씀하셨습니다. “서 선생, 내가 말이야. 동네 사람들한테 밥 한 그릇 대접해고 싶은데 날짜를 잡아보게.” 여태 한 번도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없었는데, 마치 한 달 뒤쯤 돌아가실 것을 미리 알고 계신 것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돌아가시기 전, 하루 앞날까지도 산밭에 밤을 주우러 가셨습니다. 덕촌 어르신 장례식 날, 가을 하늘은 마냥 맑고 높았습니다. 한평생 가난과 서러움을 삭이고 견디며 농사지으시다 떠난 농부의 장례식은 무척 가난하고 소박했습니다. 이름난 국회위원도 장관도 도지사도 오지 않았지만, 여기저기 낮은 언덕에 활짝 핀 하얀 들꽃들이 가시는 길을 환히 밝혀 주었습니다. 그래서 더욱 마음이 아팠습니다.
 
닳지 않는 손

날마다 논밭에서 일하는
아버지, 어머니 손.
 
무슨 물건이든
쓰면 쓸수록
닳고 작아지는 법인데
일하는 손은 왜
닳지 않을까요?
 
나무로 만든
숟가락과 젓가락도 닳고
쇠로 만든
괭이와 호미도 닳는데
일하는 손은 왜 닳지 않을까요?
 
나무보다 쇠보다 강한
아버지, 어머니 손.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지는 들꽃처럼 쓸쓸한 농부들의 손으로, 백성들의 머슴인 어진(?) 대통령을 먹여 살렸습니다. 똑똑한(?) 국회의원과 장관들과 도지사와 교육감과 판검사와 변호사와 의사와 교수와 박사와 학자와 재벌들까지 다 먹여 살렸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피겨 여왕 김연아도 축구 선수 박지성도 노래 잘 부르는 싸이도 먹여 살렸습니다. 자라나는 청소년들과 어린이도 다 먹여 살렸습니다. 농부들은 돈을 벌려고 농사짓지 않습니다. 돈이 안 되는 줄 뻔히 알면서도 농사를 짓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땅이 농부들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수천 년 전부터 많은 철학자와 신학자와 시인들이 농부를 성직자 가운데 가장 훌륭한 성직자라고 했답니다. 이런 훌륭한 성직자들이 농사짓는 땅에, 거룩한 땅에, 철탑을 세우고 한 마을 사람들을 이간질하여 온갖 욕심을 다 채우려 합니다.
시멘트와 아스팔트로 뒤덮여 물 한 방울 스며들지 못하는 메마른 도시보다 작은 산골 마을 하나가 더 소중하지 않겠습니까? 지구온난화의 주범인 높고 화려한 빌딩 열 개 백 개보다 논 한 마지기가 더 소중하지 않겠습니까? 넥타이를 매고 서 있는 신사 백 명 천 명보다 괭이를 든 농부 한 사람이 더 소중하지 않겠습니까? 무엇이 더 소중한지조차 모르는 막돼먹은 인간들이 온갖 거짓과 악행으로 권력과 돈을 쥐어 잡고 나라를 마구 흔들고 있으니 어찌하면 좋단 말입니까?

착한 사람이란
 
오랜만에 도시에 사는 친구가 찾아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았습니다. “서 시인, 이런 산골에서 무슨 재미로 사나? 농사일 힘든 데다 돈벌이가 되는 것도 아니고, 문화 혜택을 누릴 수도 없고 말이야. 아직까지는 빌어먹더라도 도시가 낫지 않나?” “이 사람이 아무리 농담이라도 그렇지. 아직 젊은 사람이 빌어먹다니? 정말 자네처럼 그렇게 생각하고 사는 사람이 많으면 세상이 어찌 돌아가겠나.” 서 시인, 나는 40년 넘도록 도시에 빌붙어 살면서 앞뒷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고 살아. 집에서 이웃들하고 밥 한 그릇 나누어 먹어본 지가 언젠지 생각도 안 나네. 자네도 알다시피 도시 사람들은 가까운 이웃이나 동료가 노름이나 사기를 쳐서 밥 먹고사는 줄 알아도 모른 척하거든. 뭐 남들 사는 데 괜히 끼어들어 봐야 좋을 거 없다고 생각하는 거지.” “그래도 그렇지. 세상에는 악한 사람보다 착한 사람들이 많지 않은가.”
“자네가 생각하는 착한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가?” “그렇지 않아도 내가 오늘 아침에 쓴 착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생각하며 쓴 글이 있다네. 들어보시게나. 누가 사람이 그리워 잠 못 이루고 있으면 가만히 밤길을 나서는 사람. 누가 아프다는 말만 들어도 마치 제 몸 아픈 듯이 밤새 뒤척이는 사람. 누가 양식이 없어 굶는다는 소식을 들으면 쌀 한 됫박 퍼서 달려가는 사람. 누가 억울한 일을 겪어 땅을 치며 통곡하고 있으면 실마리를 찾으려고 밤을 새는 사람. 누가 부지런히 일을 하고 임금을 떼였다는 말을 들으면 당장 달려가 사장 멱살을 잡고 싶은 사람. 누가 제 잇속만 차리려고 사람을 속인다는 말을 들으면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는 사람. 남의 실수와 잘못을 보면 혹시 ‘나’도 잘못 살고 있지 않나 싶어 제 삶을 되돌아보는 사람. 남한테 아무런 조건도 기대도 없이 베풀고 또 베풀면서도 그저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사람. 담을 넘어 들려오는 이웃집 늙은이의 기침소리를 듣고 까닭도 없이 눈물 흘리는 사람. 골목길에서 발자국 소리만 들려도 아, 사람이구나 싶어 그냥 마음 설레는 사람. 이런 사람이 아닐까 싶네.”
“서 시인, 요즘 그런 사람이 도시에 몇 명이나 되겠나. 까놓고 말하면, 날이 갈수록 힘 있고 돈 많은 사람들한테 굽실거리고 남 속이지 않으면 밥 먹고살기 어려운 데가 도시라 이 말이네.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라니까. 서로 살아남으려고 아등바등하면서 사는 게, 막말로 사기 치는 일이잖아. 지나가는 사람들 붙잡고 물어보라니까, 내 말이 맞나 틀렸나. 아니면 성직자나 수도자들한테 물어보게. 도시 사람 가운데 땀 흘려 일하면서 정직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는지. 만일 있다면 성인이거나 아니면 미친놈이겠지.” “그래도 눈에 보이지 않지만, 세상 곳곳에 사람과 자연을 섬기며 사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가? 내가 잘 알고 지내는 강우성 선생은 초등학교 교사인데 집안 가훈이 ‘지구를 살리자’라고 하더군. 하하하! 얼마나 훌륭한 가훈인가.” “서 시인, 지구온난화니 뭐니 언론에서 떠들어 봤자 남의 일처럼 여기는 게 도시 사람들이야. 돈 많이 벌어 남들보다 편하게 먹고살기 위해 얼마나 바쁜데, 그따위 말이 귀에 제대로 박히겠나. 그나마 가장 검소하고 깨끗한 삶을 살고 있다는 성직자와 수도자들을 보면 ,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 잘 알 수 있지 않은가. 자네는 입만 살아서 하느님이니 부처님이니 나불대는 사람을 착한 사람이라고 하는 거 아니지?” “이 사람이, 사람을 어찌 보고…….”
 
밥 한 숟가락에 기대어
 
밥 한 숟가락
목으로 넘기지 못하고
사흘 밤낮을
꼼짝 못하고 끙끙 앓고는
 
그제야 알았습니다.
밥 한 숟가락에 기대어
여태
살아왔다는 것을.
 
친구를 돌려보내고 안타까운 생각이 들어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산다는 게 뭔가? 누구나 밥 한 숟가락에 기대어 사는 것인데, 밥 숟가락 놓으면 저녁연기처럼 사라질 것인데…….
 
소농 그리고 희망
 
고용인을 두지 않고, 가족끼리 짓는 소규모의 농사, 또는 그러한 농민을 소농(小農)이라 합니다. 중농(中農)과 대농(大農)은 말씀드리지 않아도 알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소농을 다른 말로 ‘가족농’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듯합니다. 저는 가끔 학교나 사회시민단체에서 강연을 할 때, 이런 질문을 자주 받습니다.
“정부에서는 대농을 키우려는 정책을 우선하는 것 같은데 왜 소농이 소중하다고 하는지요? 왜 소농을 살려야 안전한 먹을거리를 공급받을 수 있나요? 왜 유기농업은 소농이 해야 하나요? 땅을 넓히고 기계를 이용하여 한 사람이 대단위 유기농업을 하면 많은 사람이 건강한 먹을거리를, 조금 더 싼값으로 사 먹을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럼 지금부터 궁금한 점을 하나씩 하나씩 풀어 보겠습니다.
첫째, 소농은 자기가 심은 농작물을 눈만 뜨면 만나는 한 식구처럼 정성껏 돌볼 수 있습니다. 사람도 자주 만나지 않으면 마음이 멀어지듯 농작물도 똑같다고 여기면 됩니다. 농작물은 저절로 자라는 들풀과 달라 잘 보살피지 않으면 시들어버리거나 병이 드니까요.
둘째, 소농은 땅심(토지가 농작물을 자라게 할 수 있는 힘)이 살아나고, 천적(어떤 생물에 대하여 해로운 적이 되는 생물)이 생겨 병해충을 스스로 이겨낼 수 있습니다. 여러 가지 농작물을 돌려가며 짓고(윤작), 같은 땅에 두 가지 이상 농작물을 섞어 지으면(혼작) 저절로 땅심이 살아나고 천적이 생기니까요.
셋째, 소농은 생산한 농작물이 지역 안에서 소비가 이루어지므로 지역 경제를 살리고 식량 주권을 지킬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발 딛고 선 땅에서 손수 농작물을 생산하여 스스로 밥상을 차릴 수 있으니까요. 그렇게 되면 농작물을 운반하거나 저장하느라 들어가는 여러 경비(석유, 인건비, 자동차 유지비, 보관비, 운송비 따위)를 줄일 수 있고, 몸에 해로운 방부제 따위를 쓰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 목숨을 이어주는 먹을거리를 지역 안에서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면 어떤 어려움이 닥쳐와도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리라 생각합니다. 외국 농산물을 사 오느라 빠져나가는 돈이 지역 안에서 돌게 되면 실업자가 줄어들고, 그렇게 윤택하게 된 지역 경제는 돈이 없어 굶거나 병드는 사람들을 위한 복지 기반이 될 수 있겠지요.
넷째, 소농은 믿을 수 있습니다. 생산자와 소비자가 한 식구처럼 지내기 때문에 이윤만을 추구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믿음 하나로 맺어진 작은 공동체라 할 수 있지요. 생산자들과 소비자들이 들녘에서 자주 만나, 함께 땀 흘려 일하다 보면 농촌과 도시는 둘이 아니라 한 공동체라는 것을 저절로 깨닫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서로의 삶을 이해하고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며 살 수 있겠지요.
소농은 품이 많이 들기 때문에 농산물 값이 싸지 않습니다. 그러나 조금 비싼 값을 주고 농산물을 샀다 하더라도, 속아서 샀다는 생각이 들지 않고 늘 고맙다는 생각이 들어 머리가 절로 숙여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농산물마다 정성과 혼이 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싼 값’이라기보다 ‘정당한 값’이라고 하는 게 맞겠지요.
어떤 물건이든 싸다고 좋은 것은 아닙니다. 더구나 사람의 몸과 마음을 살려주는 음식인데 싼 것만 찾아서야 되겠습니까? 멀쩡한 물건이 값이 쌀 때는 틀림없이 무슨 까닭이 있지 않겠습니까? 아니, 무슨 까닭이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농약 범벅인 농산물을 먹고 살다가, 하루하루 농약이 몸에 차곡차곡 쌓여 깊은 병이 들면 아무도 치료비를 주지 않습니다. 누구나 잘 알고 있듯이 한 번 병든 몸을 다시 회복하려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리석은 일 가운데 가장 어리석은 일이 어떤 목적이나 이익을 이루느라 자기의 몸을 해치는 것입니다. 몸을 해치는 음식은 죽은 음식입니다. 죽은 음식은 아무리 맛있다 하더라도 몸을 병들게 하고 나라를 병들게 하고 세상을 병들게 할 것입니다.
그밖에도 소농을 살려야만 하는 까닭은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자급자족할 수 있는 삶을 통해 사회를 안정시키고, 식량자급률을 높여 식량안보에 버팀목이 되고, 물질이 중심이 되는 메마른 사회를 사람과 자연중심으로 이끌어가면서 고향처럼 푸근한 정을 느끼게 하고, 자라나는 아이들과 함께 일하면서 놀이와 문화를 만들어 갈 수 있고, 그리하여 먹을거리와 노동의 소중함을 일깨워 줄 수 있고, 지역마다 알맞은 토종종자를 보존하여 종자주권을 지켜나가고, 생물의 다양성을 연구하여 사람과 자연을 살리는 데 이바지할 수 있습니다.
소농을 살리는 길은 ‘거창한’ 게 아닙니다. 도시에서 사는 가족이 소농과 ‘자매결연’을 맺어 한 형제처럼 자주 찾아가서 일손을 거들고, 밥을 나누어먹고, 생산한 농산물을 서로 나누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소농이 늘어나야만 오염된 자연이 되살아나고, 자라나는 아이들과 모든 사람이 건강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렇게 소중한 소농을 늙고 병든 농민들에게 맡겨 놓고, 다리 뻗고 잠들 수 있겠습니까? 우리 목숨을 살려주고 아이들의 미래를 짊어지고 가는 농민이 젊고 건강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우리 모두 다리 뻗고 잠들 수 있지 않겠습니까?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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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설과 한파에 따른 물류 차질로 농산품 가격이 폭등했다. 농림수산식품부는 5일 서울 가락동 농수산물시장에서 ‘청과류(채소와 과일) 407개 품목 가운데 107개 품목의 낙찰 가격이 하루 전보다 10% 이상 올랐다고 밝혔다. …… 품목별로는 상추가 4kg짜리 상등급 기준 5만9482원으로 하루 만에 42%나 뛰었다. 시금치 값은 400g당 1650원에서 2075원으로 25% 올랐다.
또 호박(10kg들이 주키니종)이 1만2755원에서 1만6484원으로 29% 상승했다. 대형마트인 이마트는 경기도 지역 시금치 도매 가격 평균이 지난주보다 114% 올랐고, 미나리(64.8%)와 깻잎(10%)도 큰 오름세인 것으로 집계됐다.”
 
위 글은 얼마 전에 한겨레신문을 보다가 오려둔 크고 작은 기사입니다. 이 기사를 같이 보던 후배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선배님, 겨울이 이렇게 추운데 언론에서는 지구 온난화니 뭐니 떠들어대며 사람들한테 겁을 줍니다.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이 사람아, 요즘 여기저기서 쓰는 말 가운데 지구온난화라는 말과 기후변화라는 말이 있다네. 이 두 가지는 모두 온실가스 때문에 생긴 말이지. 온실가스 때문에 교란된 지구 생태계는 그 변화 과정에서 더워지는 현상만 생기는 것이 아니라 해일, 한파, 폭설, 폭우 같은 것도 일어나게 된다네. 기후가 시도 때도 없이 갑자기 변하면서 추워지기도 하고 더워지기도 하지. 그러니 우리나라에서 여태 이어온 ‘삼한사온’이라는 말도 벌써 사라진지 오래 되었다네. 이것도 모두 자네가 말하는 지구 온난화 때문이라네.”
앞날을 걱정하는 학자들은 몹쓸 인간들 때문에 날이 갈수록 지구가 몸살을 앓고, 앞으로 무서운 자연 재해와 식량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 합니다. 그러나 하루하루 살아가기 바쁜 사람들은 한 번 듣고 나면 마치 남의 일처럼 여깁니다. 그러니 아무리 소농이 소중하다고 떠들어도 ‘소 닭 보듯 닭 소 보듯’ 하는 것이지요.
지역마다 소농이 살아 있으면 폭설과 한파뿐만 아니라 홍수와 가뭄 때라도, 농산품 가격 폭등을 상당히 줄일 수 있습니다. 폭설과 한파로 자동차와 비행기가 다니지 못하는데 어찌 경남 통영에서 생산한 시금치가 서울까지 갈 수 있겠습니까? 앞으로 다가올 무서운 기상 이변을 생각해서라도 소농을 꼭 살려야 합니다.
 
아이들을 자연의 품으로
 
어린이들한테 행복하냐고 물어보시겠습니까? 만약 어린이들이 행복하지 않다면 그 책임은 어른들이 모두 져야 합니다. 어린이들의 몸을 지켜주는 음식에까지 온갖 방부제와 농약과 화학첨가물이 판치는 나라에서,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과자와 빵 따위를 만드는 밀의 자급률이 1%밖에 안 되는 자랑스런(?) 대한민국에서, 수천 년 우리 겨레의 목숨을 이어준 쌀마저 위협받고 있는 세상에서, 나라 꼴이 어떻게 되든지 돈벌이만 된다면 벌떼처럼 달려들어 사회를 어지럽히는 어른들 속에서, 어린이들이 어디에서 기쁨과 희망을 찾을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섭니다.
먹는 것, 입는 것, 노는 것, 어느 한 가지도 어린이들이 선택할 수 없는 세상입니다. 어린이들은 좋든 싫든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세상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어린이가 아니라 돈만 좇아서 살아가는 어른들입니다. ‘경제논리’에 빠져 농촌이고 자연이고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고도 뉘우칠 줄 모르는 어른들이 문제입니다. 이런 어른들이 어린이를 걱정할 겨를이 있겠습니까?
어느 도시 학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담임선생이 아파트 주변에 피어 있는 들꽃을 관찰해 오라는 숙제를 냈답니다. 학교 마치고 학원 두세 군데씩 기계처럼 돌아다니던 ‘착한 아이들’은, 밤 열 시가 지나서 손전등을 들고 아파트 주변을 서성거렸습니다. 멀리서 그 모습을 보고 달려온 아파트 경비아저씨가 놀라서 “얘들아, 지금 뭐 하고 있니?” 하고 물었더니 “숙제 하고 있는데요” 하더랍니다. 이런 억지스러운 자연 공부가 어린이들한테 어떤 영향을 줄 수 있을까요.
수천 년 동안 자연 속에서 자연과 더불어 스스로 놀이를 만들어 즐기던 어린이들은, 어느 날 갑자기 놀이를 잃어버렸습니다. 문명의 발달과 함께, 전환과 개발을 으뜸으로 생각하는 나라답게 고층아파트와 자동차가 헤아릴 수 없이 늘어났고, 텔레비전과 컴퓨터가 집집마다 자리 잡으면서 ‘놀이문화’가 모두 없어져 버렸습니다.
정서에 도움을 주는 동요나 전통 놀이문화는 멀리하고, 딱딱하고 차가운 컴퓨터와 텔레비전과 가까이 지내고부터 소비를 부추기는 대중문화가 자리 잡은 지 오래입니다. 아이들한테 어떤 세상을 물려줄 것인지 깊이 고민하지 못한 어른들이 소중한 어린이 문화를 모조리 짓밟은 것이지요. 더 늦기 전에 어린이들이 무엇을 바라는지, 그렇게 바라는 것이 다음 세대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깊이 생각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길은 한 가지밖에 떠오르지 않습니다. 모든 불행은 인간이 ‘생명의 어머니’인 흙(농촌, 자연)을 떠나서 일어난 것이니 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심심풀이 삼아 가는 주말농장이 아니라, 삶 전체가 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어린이들이 자연 속에서, 자연을 마음껏 품에 안고, 자유로운 삶을 이어갈 수 있도록 말입니다.
메모리 반도체 생산량 세계 1위, 선박 건조율 세계 1위, 핸드폰 보급률 세계 1위, 철학도 없는 교육열 세계 1위, 인터넷 이용시간 세계 1위, 이따위를 일등 하기 위해 일하는 시간도 세계 1위입니다. 흡연 인구도, 청소년 자살 인구도, 이혼율도, 교통사고도, 40대 사망률이나 암 사망률도, 이등 하라면 서러울 만큼 높습니다. 이런 비틀어진 나라를 아이들에게 물려준다면 정말이지, 어른으로서 아무 할 말이 없습니다.
 
아이들은 놀 시간의 대부분을 사교육 자본가들에게 빼앗기며, 참으로 눈물겹게 확보한 자투리 시간들마저 교활한 연예산업 자본가들과 게임산업 자본가들과 통신산업 자본가들에게 모조리 빼앗긴다. 한국인들은 소를 잡아 고기는 물론 머리끝에서 꼬리끝까지 한 군데도 빼놓지 않고 먹어치우는 걸로 유명한데 한국 아이들이 바로 그 짝이다. 한국에서 교육이란 아이들의 영혼이 성장할 시간을 1분1초도 허용하지 않는 노력을 뜻한다.
 
위 글은 김규항 선생이 쓴 글입니다. 아이들의 영혼조차 돈으로 여기는 자본가들에게서 우리 아이들을 하루빨리 건져 내야 합니다.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자동차, 아파트, 컴퓨터, 텔레비전, 돈 따위가 주인 노릇을 하는 도시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부모보다 돈을 더 소중한 가치로 여기는 아이들의 영혼을 다시 살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폭력과 불륜이 뒤섞인 성인 만화와 영화 그리고 결과를 안 봐도 ‘뻔한’ 연속극에 빼앗긴 아이들을 건져 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연 속에서 즐겁게 뛰놀고 스스로 먹을 곡식을 기르며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의 길’을 함께 열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도시는 사람과 사람을 나누고, 사람과 자연을 나누어 놓은 어둡고 슬픈 곳이라, 머물면 머물수록 자기도 모르게 몸과 마음에 깊은 병이 듭니다. 내가 병들면 따라서 모든 생명이 병듭니다. 도시는 어쩔 수 없는 처지 때문에 잠시 머물다 가는 곳이지, 절대 오래 머물면 안 되는 곳입니다. 이제 아이들 손을 잡고 돌아가야 합니다. 아이들이 자연의 품 안에서 무럭무럭 잘 자랄 수 있도록 어른들이 그 터전을 마련해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먼저 나를 바꾸어야
 
지난 역사를 돌아보면 지도자 한 사람 잘못 뽑아서 세상이 어지러워지기도 했지만, 지도자를 따르는 무리들이 맡은 일을 제대로 하지 않고 제 배를 채우기에만 바빠 백성들을 섬기지 못한 경우도 많았습니다.
요즘도 누가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 되면 사이비 언론들은 입을 맞추기라도 한 듯, 누가 일등공신이니 어쩌고저쩌고 떠들어대면서 서로 치켜세우기 바쁩니다. 그들을 일꾼으로 뽑아준 사람이 백성인데 백성을 우습게 여기는 것입니다. 참사랑은 조건이 없을 때 이루어지는 것인데, 권력과 재산에 눈먼 인간들은 늘 조건을 달고 사랑을 합니다. 그러니 어찌 일꾼으로 뽑아준 가난한 백성이 주인으로 보이겠습니까?
하루하루 먹고살기에 바쁜 가난한 백성들은 그저 믿음 하나만으로 이날까지 살아왔습니다. 그 믿음이 깨졌을 때는 대통령도 감옥에 보내고 국회의원, 장관, 시장, 군수, 교육감 들을 가리지 않고 갈아치웠습니다. 그렇게 젊음을 바치고 때론 목숨까지 내놓으며 애를 쓰고 살았는데, 왜 날이 갈수록 하루도 마음 편할 날 없이 살아야 합니까?
그 까닭은 그렇게 애써 살아온 착한 사람의 힘보다, 착한 사람을 누르는 힘이 더 세다는 데 있습니다. 돈과 권력을 거머쥔 몇몇 ‘조무래기’들은 어떻게 하면 착한 사람들을 이용하여, 제 손 안에 든 돈과 권력을 마음껏 누릴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고 연구합니다. 날마다 밥 먹고 하는 짓이 그뿐입니다. 땀 흘려 일하고 정직하게 살아가는 어진 백성들과 그놈들은 생각부터 다릅니다. 그러니 몇 놈 갈아치운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그 아래 빌붙어 살아가는 놈들이 또 그 자리를 채우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옛날이나 지금이나 용기 있는 분들이 제 욕심 차리지 않고 노동조합과 농민회와 여러 단체와 조직을 만들어 그놈들과 맞서 싸우고 있으니 어진 백성들이 그나마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분들이 없었다면 세상은 이미 사람이 살 수 없는 ‘폐허’로 바뀌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농림부장관을 바꾸어도 농촌은 점점 무너지고, 환경부장관을 바꾸어도 환경은 갈수록 오염되고, 새로운 교육부장관 아래서도 아이들은 공부에 시달려 가출을 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합니다. “초등생 13% 시험 끝난 뒤 ‘죽고 싶다’, 41% 손떨림, 39% 식은땀 등 몸에 이상”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아이들이 저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자유롭게 살지 못하고 ‘못된 어른들’이 만든 비틀어진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아이들 말을 으뜸 자리에 두고 20년 가까이 ‘마주이야기’ 교육을 해온 박문희 선생님의 교육 이야기 책 《마주이야기, 아이는 들어주는 만큼 자란다》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제목은 〈엄마는 오래 살아도 나는 오래 못 살아〉입니다.
 
민석 : 내가 엄마 말 잘 들어야 엄마 오래 살아?
엄마 : 그럼.
민석 : 그럼 엄마는 오래 살아도 나는 오래 못 살아.
엄마 : 왜?
민석 : 엄마 말 잘 들으려면 엄마가 하라는 대로 해야 되는데, 공부하라면 공부해야 되고, 밥 먹으라면 밥 먹어야 되고, 하지 말라면 안 해야 되는데, 그럼 엄마는 오래 살아도 나는 오래 못 살아.
 
민석이는 이제 겨우 일곱 살 아이지만, ‘못된 어른들’의 생각에 놀아나지 않으려고 합니다. 꼭두각시처럼 시키는 대로 살면 스트레스를 받아서 오래 살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압니다.
사람은 누구나 땀 흘려 일하고 정직하게 살면서 마땅한 노동의 대가를 받으며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어린이들한테 물어보아도 땀 흘려 일하고 정직하게 살면 잘살 수 없다고 대답합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어른’이란 이름이 얼마나 부끄러운지 모릅니다.
꽃이 피면 지듯이 어떤 목숨붙이라도 살아 있는 것은 모두 죽게 마련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때가 조금 이른 사람도 있고 조금 늦은 사람이 있을 뿐이지, 누구나 다 죽습니다. 마땅히 죽어야 합니다. 태어나자마자 인간은 죽음의 그림자를 뒤집어쓰고, 죽음을 향해 한 발 한 발 나아가는 것입니다. 오늘은 ‘네’ 차례지만 내일은 ‘내’ 차례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죽음을 잘 준비해야 합니다.
잘 죽기 위해서는 잘 살아야 합니다. 스스로 가난을 택하여 가난한 이웃들과 더불어 살아야 정말 잘 사는 것입니다. 스스로 선택한 그 가난만이 세상을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 만약 내가 집을 두 채 가지고 있으면 분명히 집 없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집이든 돈이든 내가 가진 것만큼 누군가 가지지 못한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내 아파트 값이나 땅값이 치솟기를 바라고, 내 자식이 명문대에 들어가거나 출세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버리지 않는다면 이 세상은 영원히 희망이 없습니다.
남의 자식은 돈벌이 안 되고 힘든 농촌에 들어가서 농약과 화학비료를 쓰지 않고 건강한 곡식을 생산해 주는 농부가 되면 좋지만, 내 자식은 도시의 빌딩 사무실 회전의자에 앉아 편안하게 살면 좋겠다는 어리석고 비겁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면, 우리 앞에 기다리는 것은 캄캄한 어둠과 비참한 죽음뿐입니다. 자연은 머지않아 이런 인간들의 이기심과 탐욕을 그대로 두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아이고 어른이고 다시는 빠져나올 수 없는 깊은 구렁텅이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다람쥐 쳇바퀴 돌듯 쉬지 않고 부지런히 살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가만히 보니 사람답게 살려고 할수록 사람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도시는 날이 갈수록 희망보다는 절망을, 행복보다는 불행을 안겨주었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 나누고 섬기는 세상이 아니라, 서로 헐뜯고 속이며 서로 견주지 않으면 버틸 수 없는 세상으로 변했습니다.
자고 일어나면 온갖 범죄와 생각하기조차 끔찍한 사고와 자연재해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날이 갈수록 세상 살기가 힘들다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욕심 때문에 생긴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애써 남의 탓으로 생각합니다. 가만히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면 금세 알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모두 다, ‘나’로부터 오는 것임을….
꽃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뿌리로부터 멀어지면 죽고 맙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모든 갈등과 죄는 사람이 자연으로부터 멀어지면서 일어난 것입니다.
어떤 자리에서 무슨 일을 하든, 또는 삶에서 무엇을 이루었건, 마음이 평화롭지 않다면 아직 행복하지 않은 것입니다. 모든 조건이 다 갖추어졌다 해도 ‘마음의 평화’가 없으면 행복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세상에서 사는 것은 단 한 번뿐입니다. 단 한 번뿐인 소중한 삶을 행복하게 살다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진정한 행복을 누리려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숨어 들어온 나쁜 버릇과 욕심을 하나씩 하나씩 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욕심을 버리는 건 생각만으로 되지 않습니다. 뜻있는 사람들과 함께 생각을 나누다 보면 깨달음이 옵니다. 그리고 진정 깨닫게 되면 반드시 실천이 따르게 됩니다. 깨닫고 실천하지 않으면 그 깨달음은 먼지와 같습니다. 우리가 살아서 꼭 해야 할 일은 먼 곳에 있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희미한 곳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내 곁에, 아니 내 마음속에 있는 것입니다.
집을 두 채 이상 가진 사람은 한 채만 남겨두고 집 없는 사람한테 거저주거나, 거저 주기 아까우면 반값만 받고 주면 어떨까요? 식구도 없는데 집이 너무 크다 싶은 사람은 작은 집으로 이사를 가면 어떨까요? 집이나 상가를 가지고 전세나 달세를 받는 사람들은 10퍼센트라도 낮추어 받을까요? 외식을 줄이고 도시락을 갖고 다닐까요? 육식을 줄이고 채식을 해볼까요? 친환경농산물을 가난한 이웃들에게 선물해 볼까요? 우리밀 국수를 삶아서 이웃과 나누어 먹을까요? 가까운 농민들과 직거래를 하거나 생협에 가입해 볼까요? 내일부터 대중교통을 이용해 볼까요? 죽으면 모든 재산을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고, 믿을 수 있는 복지재단이나 사회단체에 물려준다는 유서를 써 볼까요?
 
“좁은 길을 갈 때에는 한 걸음 멈추어 남을 먼저 가게 하고, 맛있는 음식은 다른 사람에게도 나누어 주어 함께 즐기는 것이 좋다. 이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가장 편안한 방법 중의 한 가지이다. 다른 사람을 위하다 보면 자신에게로 그 보답이 돌아온다. 그러므로 남을 위하는 것이 곧 나를 위하는 것이다.”
 
동양의 10대 고전이자 영원한 베스트셀러라는 《채근담》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하다 보면 그 보답이 돌아오기는커녕 손해를 입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손해 또한 하늘에 재산을 쌓는 것이라 생각하면 그리 억울하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보답이란 것이 살아 있는 ‘내’게 돌아오지 않는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반드시 누군가에게 돌아가서 누군가를 기쁘게 하기 때문입니다.
무너진 농업과 농촌을 살리고, 오염된 환경을 살리고, 흐트러진 나라를 살리고, 메마른 사람의 마음을 살리는 일은 이런 작은 실천이 따를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대통령이나 대쪽 같은 법이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따뜻한 ‘사람의 정’이 세상을 바꾸는 지름길입니다.
좋은 일은 죽어서는 할 수 없는 것이니 미루면 안 됩니다. 내일이면 이미 늦습니다. 자고 나면 착한 내 마음이 어디로 달아날지 모르니까요. 그러니 하루라도 빨리 실천할수록, 그만큼 세상은 평화롭고 아름다워질 것입니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합니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들의 끝없는 욕망 때문에 지구가 몸살을 앓아 온갖 자연재해가 일어나고 있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김구 선생님 말씀이 떠오릅니다. 우리나라는 세계 열한 번째 경제대국이라는데, 얼마나 더 편리해지고 더 잘살아야 하는 걸까요? 텔레비전, 비디오, 컴퓨터, 자동차, 휴대전화, 사진기, 냉장고에 김치냉장고까지, 여기에 또 무엇을 더 가져야만 ‘욕심의 끝’을 볼 수 있을까요? 대통령을 잘 뽑는다고 그 ‘욕심의 끝’을 볼 수 있겠습니까? 대통령을 바꾼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나를 바꾸고 비뚤어진 사회체제를 바꾸어야 합니다.
 
영국의 웨스트민스터사원에 묻힌 어느 성공회 주교의 묘비에 이런 글이 적혀 있다고 합니다.
 
“내가 젊고 자유로워 무한한 상상력을 가졌을 때, 나는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꿈을 가졌다. 좀더 나이가 들고 지혜를 얻었을 때, 나는 세상이 변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나는 내가 살고 있는 나라를 변화시키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그것 역시 불가능한 일이었다. 황혼의 나이가 되었을 때는 마지막 시도로 나는 가장 가까운 내 가족을 변화시키겠다고 마음을 정했다. 그러나 아무도 달라지지 않았다. 이제 죽음을 맞이하는 자리에서 나는 깨닫는다. 만일 내가 나 자신을 먼저 변화시켰더라면 그것을 보고 내 가족이 변화했을 것을. 또한 그것에 용기를 얻어 내 나라를 더 좋은 곳으로 바꿀 수 있었을 것을. 누가 아는가, 그러면 세상까지 변화했을지.”
 
어렵더라도 먼저 나를 바꾸어야 세상이 바뀝니다. 바꾼다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쉽게 말해서 본디 있던 것을 다르게 갈거나, 달라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디 있던 것이 얼마나 잘못되었는가를 먼저 알아야만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부터는 아이들이 무엇을 바라는지 귀담아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아이들 마음속에 ‘본디 있던 것’이 다 들어 있으니 정답도 그 안에 들어 있습니다. 농촌과 환경과 교육을 살리는 길도, 모든 생명과 사람을 살리는 길도, 모두 그 속에 있습니다. 아이들은 살아 있는 스승입니다. 아이들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세상이야말로 참 살맛나는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 농부 시인 서정홍은, 현재 합천 황매산 기슭 작은 산골 마을에서 농사를 지으며 ‘열매지기공동체’와 ‘강아지똥학교’를 열어 이웃들과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배우고 깨달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땀 흘려 일하면서 일하는 사람이 글을 써야 세상이 참되게 바뀐다는 걸 깨닫고, 글쓰기에도 힘을 기울여 ‘전태일문학상’(1992년), ‘우리나라 좋은 동시문학상’(2008년), ‘서덕출문학상’(2013년)을 받기도 했습니다. 지은 책으로 시집《58년 개띠》(보리),《아내에게 미안하다》(실천문학사),《내가 가장 착해질 때》(나라말),《밥 한 숟가락에 기대어》(보리) 동시집《윗몸일으키기》(현암사),《우리 집 밥상》(창비),《닳지 않는 손》(우리교육),《나는 못난이》(보리) 자녀교육이야기《아무리 바빠도 아버지 노릇은 해야지요》(보리), 산문집 <농부 시인의 행복론>(녹색평론사), <부끄럽지 않은 밥상>(우리교육) 들이 있습니다. 중고등학교 국어교과서와 초등학교 교사용 지도서에 <닳지 않은 손>, <우리말 사랑>, <손금을 보면서>, <털장갑>, 과 같은 시들이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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