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적 사회통합’을 위한 민주시민교육의 원칙에 대한 모색 상세정보
‘민주적 사회통합’을 위한 민주시민교육의 원칙에 대한 모색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14/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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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민주주의의 위기와 시민을 위한 교육
: ‘민주적 사회통합’을 위한 민주시민교육의 원칙에 대한 모색
 
장 은 주 (경기도교육연구원 선임연구위원)
 
.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와 민주시민교육의 필요성
 
한국의 민주주의는 30년 가까이나 자랐으면서도 지금 제대로 꽃도 피워보지 못하고 시들해져 가고 있다. 최근 우리는 우리 사회에서 선거, 언론의 공정성, 사법부의 독립, 집회나 결사의 자유 같은 가장 기본적인 절차적 민주주의의 요건들마저 이런 저런 방식으로 ‘돈’과 ‘권력’의 논리에 의해 결정적으로 오염되어 있음을 목도하고 있다. 이른바 미네르바 사건에서처럼 말 한마디 잘못했다고 시민이 구속되는 일이 벌어지더니 정부에 의해 민간인 사찰이 자행되는가 하면 국가정보원이 선거에 개입하고 정부가 자의적 잣대로 노조를 불법화하고 정당을 해산하려 나선다. 언론은 언론대로 권력이 통제하거나 스스로 권력기관화 되어 있다. 한국이라는 민주공화국에서는 이렇게 그 표명된 이름에는 걸맞지 않게 너무 많은 비민주적 요소들이 잔존하고 있거나 복귀하고 있다.
사람들은 흔히 우리 사회가 ‘형식적 민주주의’는 어느 정도 완성했는데 ‘실질적 민주주의’는 아직 이루지 못했다는 식으로 말을 한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목도하고 있는 현실은 그 형식적 민주주의조차 제대로 형성되지 못했거나 무너져 내리고 있음을 방증하고 있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지금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다. 그래도 주기적 선거가 이루어지고 있고 평화적인 정권 교체의 전통이 확립된 것처럼 보이기에 우리의 민주주의를 아예 민주주의가 아니라고까지는 할 수 없다면, 우리는 이런 민주주의를 기껏해야 어떤 ‘결손 민주주의’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이는 독일의 비교정치학자 볼프강 메르켈(Wolfgang Merkel) 등이 민주주의와 권위주의 사이에 있는 제한적 민주주의, 곧 선거 제도의 존속에도 불구하고 통상적인 민주주의 체제에서라면 기대되는 광범위한 기본권 보장과 권력 분립 등에서 장애를 보이고 있는 지배체제를 가리키기 위해 사용하는 개념인데, 한국의 민주주의는 전형적인 이 결손 민주주의의 한 유형에 속할 것이다. 이 결손 민주주의의 한 유형은 정부가 의회를 우회할 수 있고 사법부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임 민주주의(Delegative Demokratie)’인데, 실제로 크로아쌍(A. Croissant)은 한국의 민주주의를 이 유형의 하나로 본다(Croissant 2000/2001).
그런데 크로와쌍의 그와 같은 평가는 국민의 정부 시기까지를 대상으로 한 것인데, 정부의 성격 그 자체보다는 이른바 ‘제왕적 대통령제’ 같은 한국 민주주의의 헌법적 설계상의 결함을 반영하고 있다고 보인다. 그러나 내가 볼 때 우리 민주주의의 상황은 그 보다 훨씬 나빠 보인다. 특히 이명박 정권 이래 정부가 시민들의 기본권 침해 행위를 버젓이 자행하고 충분히 독립적이지 못한 사법부가 이를 추인 또는 방조해 온 일 등을 생각해 보면, 한국 민주주의의 결손성은 그런 결함을 훨씬 넘어서는 것으로 보인다. 메르켈 등의 모델에서 그 결손 민주주의의 또 다른 한 유형으로는 좀 더 악질적인, 곧 권위주의와의 경계가 희미해져 버린 ‘비자유 민주주의(Illiberale Demokratie)’가 있는데, 안타깝게도 한국의 민주주의는 이제 이 유형으로 전락해 버렸다고 해야 마땅할 것처럼 보인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자유 민주주의’를 무슨 신주단지 모시듯 한다는 정치 세력이 집권하고 있는 동안에 말이다.
우리 민주주의의 이런 결손성은 당연하게도 우리 사회가 민주정치를 통해 해결해야 마땅할 수많은 문제들을 방기하거나 오히려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사회권을 포함한 기본권 보장의 정도도 미약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고삐 풀린 시장에 대한 통제가 실패하여 이른바 ‘갑-을 관계’가 만연하고 대기업의 전방위적인 경제 지배가 강화되며 사회경제적 양극화는 끝없이 심화되는 등의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때문에 시민들은 자신들이 겪고 있는 이 땅에서의 삶의 불안과 고통을 민주정치가 적어도 견딜 수 있을 만하게는 다스려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나 전망을 더 이상 갖지 못하고 아예 정치에서 등을 돌리고 있다. 그래서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 상황은 더욱 더 심화될 것 같기만 하다.
이러한 상황은 아주 다양한 각도와 관점에서 그 원인이 진단되어야 하고 또 그에 따른 해법도 모색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볼 때 그 동안 우리 사회에서 우리 민주주의의 문제를 진단하고 그 치유의 방향을 모색해 왔던 많은 접근법들은 민주주의를 일차적으로 특정한 지배의 형식이나 좁은 정치적 제도로서만 이해하고 또 그런 차원에서만 해법을 찾으려 하는 경향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단지 어떤 정부나 지배의 형식일 뿐만 아니라 또한 하나의 삶의 양식이기도 하다(장은주, 2014). 민주주의는 단순히 정치적이거나 경제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개인들의 정체성이나 인성, 사람들 사이의 다양한 사회적 관계 방식이나 교통 형식, 심지어 사람들의 삶을 이끄는 문화적-도덕적 가치의 문제와도 연결되어 있다. 거시적이고 제도적인 접근법의 의미 자체를 완전히 무시해서야 안 되겠지만, 우리는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가 어쩌면 더 본질적으로 바로 이런 시민들의 일상적인 시민사회적 삶과 연관이 있음을 놓쳐서는 안 된다.
내가 볼 때 가장 큰 걱정거리 중의 하나는 지금 한국의 시민사회가 극단적인 증오와 배제의 정치 문화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일간베스트’(알베) 같이 정치적 의견 차이에 대한 단순한 반대 의사 표명을 넘어 이견을 가진 동료 시민들에 대한 극단적인 혐오와 척결을 선동하고 공격적 폭력성을 조장하는 시민사회적 문화 공간이 날이 갈수록 확대되고 있다. 이른바 ‘가스통 할배들’ 같은 극우 세력의 발호도 문제지만, 숱한 젊은이들이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하며 제 발로 이른바 ‘일베충’의 대열에 합류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신자유주의적 경쟁 논리의 격화와 그에 따른 사회양극화의 심화가 그런 현상에 기름을 붓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다른 한 편 이들을 ‘꼴통’이라 부르며 또 다른 종류의 극단적 혐오감을 폭력적으로 드러내는 반대 진영의 사람들 또한 적지 않다. 민주적이고 진보적이기를 자처하는 사람들도 이견을 가진 다른 세력이나 사람들에 대한 극단적인 불신과 반감에 사로잡혀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어떤 경우는 배제의 언어와 행태에 오염되어 자기들끼리도 서로 반목하며 갈래갈래 찢겨져 있다. 통합진보당 분열 과정에서 그들 중의 일부는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서는 물리적 폭력도 서슴지 않을 수 있음을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머잖아 ‘좌파 가스통 할배들’도 등장할 기세다. 그들도 민주주의를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이며 민주 사회의 시민으로서 갖추어야 할 지향과 품성과 태도를 충분히 보여주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
한마디로 우리는 지금 절차적 민주주의의 손상 때문만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또한 진영의 좌우를 막론하고 민주주의를 위한 ‘시민적 덕성(civic virtue)’을 표현하고 또 길러 줄 민주적 시민 문화의 부재 때문에 고통 받고 있다. 우리 민주주의의 위기는 곧 ‘시민성(citizenship)’의 위기인 것이다. 이념을 떠나 정치적 상대를 절멸시켜야 할 대상으로만 여기는 사람들, 다름을 포용하고 서로를 존중하며 이견을 지닌 상대라도 품위와 예의를 갖추어 대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제대로 된 민주주의를 만들고 꾸려갈 수 없음은 자명하다. 우리 사회는 지금 민주화 이후 30년이 다 되어 가도록 시민들이 민주적인 가치와 지향과 태도를 일상적으로 실천하지 않으면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할 수 없다는 이 단순하고도 근본적인 진리를 외면해 온 데 대한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시민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존재가 아니다. 시민은 길러지고 교육되어야 한다. 민주주의는 인류 역사가 발전시킨 정치 체제 중에서 사람들이 배우지 않고는 꾸려갈 수 없는 유일한 정치체제다. 가정에서부터 학교를 거쳐 일상적인 삶의 공간으로 나아오면서 민주적인 가치와 지향과 태도를 몸에 배워 익히고 사회의 정치 과정에 나름의 몫을 갖고 참여하여 조율할 줄 아는 능력을 키운 사람만이 민주주의의 온전한 시민이 될 수 있다. 동료 시민들을 어떤 말씨와 태도를 가지고 대해야 하는지를 익히는 것은 물론 자신의 이해관계를 공동체 전체의 이해관계와 어떻게 조율해야 하는지를 배운 시민들만이 민주주의를 살아있게 만들 수 있다. 그리고 단지 분명한 목적과 방향과 내용을 갖춘 교육만이 이 과제를 감당할 수 있다.
사실 우리나라의 ‘교육기본법’은 모든 구성원이 ‘민주시민으로서 필요한 자질’을 갖추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고 천명하고 있다(제 2 조). 하지만 우리 사회의 공교육이 그와 같은 목적을 제대로 추구하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고등학교까지의 학교들은 대학 입학을 위한 준비 기관이 된지 오래되었고, 대학은 대학대로 직업교육기관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 일베충 같은 ‘청년 극우’의 등장은 우리 사회가 이렇게 스스로가 설정한 교육의 본래 사명을 오랫동안 방기해 온 결과이기도 할 것이다.
학교 바깥이라고 사정이 나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열악하다. 대부분의 시민들이 단지 ‘먹고 사는 문제’에 우선적으로 매달리는 삶을 살아야해서만이 아니라 ‘먹고 살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는 삶의 문법을 강요받아야 해서다. 기껏해야 몇 년에 한 번 씩 이런 저런 선거에 나설 기회는 가지나 생계 때문에 그마저 제대로 챙길 여유가 없는 시민들이 부지기수다. 그러나 더 심각한 문제는 투표장에 가서도 제대로 된 정보를 바탕으로 충분한 숙고 뒤에 권리를 행사하는 시민은 소수에 불과한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다. 언론이든 행정 기관이든 시민 단체든 올바른 민주적 시민성을 함양하기 위한 기회를 거의 제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SNS의 공간이 그런 역할을 하는가 싶더니 오히려 이견을 가진 동료 시민들에 대한 상호 불신과 반목만 조장하는 듯하다. 각종 선거 때마다 불거지는 지역주의의 망령이 사라질 기미가 조금도 보이지 않는 것은 이런 탓도 크지 않을까 싶다.
민주화를 이루어내고 민주주의를 지켜 온 한국 시민사회의 운동적 힘은 결코 약하지 않다. 때로는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자유와 정의를 외칠 수 있는 결기를 지닌 숱한 시민들의 참여와 헌신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 정도의 민주주의도 결코 누릴 수 없었으리라. 그러나 돌이켜보건대 우리 시민사회는 일상적인 시민문화와 시민적 삶의 기풍을 민주적으로 벼려내고 뿌리내리게 하는 데에는 무관심했고 또 무능하기도 했다.
우리 민주주의의 참된 주체가 될 수 있는 시민을 형성하기 위한 교육, 곧 ‘민주시민교육’을 활성화시키기 위한 전사회적 노력이 절실하다. 학교 교육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지역 자치 단체나 시민사회적 조직들 수준 모두에서, 그리고 민주적이기를 지향하는 모든 정치 진영을 아울러, 우리 민주주의를 지키고 일상적으로 뿌리내리게 하기 위한 시민성 함양 교육의 원칙과 틀을 마련하려는 공동의 노력을 당장이라도 시작해야 한다. 이 글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우리 사회에서, 특히 학교 교육에서 민주시민교육의 활성화를 위해 그 기본 원칙과 방향을 모색해 보려는 목적을 갖고 있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 민주시민교육을 활성화해 보려는 노력은 심각한 장애 하나를 마주할 수밖에 없다. 다름 아니라 우리 사회의 극심한 이념 대립 때문에 민주시민교육이 그 자체로 심각한 사회정치적 갈등의 대상이 되고 말 우려가 크다. 우리는 그 대립이 정치적 양극화를 산출하는 것을 넘어 시민사회 수준에서도 증폭되어 나타나면서 사회의 해체를 위협하고 있음을 목격했다. 우리는 어떻게 민주시민교육에서 때때로 냉전적인 극한성을 드러내곤 하는 이런 종류의 갈등과 대립을 에둘러 갈 수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한 설득력 있고 사회적으로 합의 가능한 답이 마련되지 않고는 우리나라 같은 상황에서 민주시민교육은 출발조차 쉽지 않을 것이다. 이 문제에 초점을 둘까 한다.
우선 나는 한국 사회의 정치적 양극화와 이념 갈등이 민주시민교육과 관련하여 어떤 문제를 야기하고 있는지부터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서 모든 정치 진영이 동의할 수 있는 ‘민주적 사회통합’을 지향하는 민주시민교육의 필요성을 지적할 것이다(II). 다음으로 민주적 사회통합이란 사회 갈등의 배제가 아니라 그 생산적 승화에서 존립함을 지적하면서, 마키아벨리의 구분을 빌려 ‘투쟁’이 아닌 ‘논쟁’으로 민주주의를 제도화하는 것만이 그것을 가능하게 할 것임을 보일 것이다(III).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념 갈등과 정치적 양극화는 더 이상 민주시민교육의 장애가 될 수 없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다름 아닌 ‘논쟁성의 원칙’에 따라 공적인 주제들을 교실에서 다루는 것이 우리 사회와 같은 곳에서 민주시민교육의 활성화를 위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는 초석이 될 수 있음을 주장하려 한다(IV). 마지막으로 나는 최근에 일어난 세월호 대참사를 배경에 두고 우리 사회에서 민주시민교육이 가질 수 있는 의미를 확인해 보려 한다(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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