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가자&GO] 짜이를 끓이는 남자ㅣ양준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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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관리자 | 등록일 | 2016/07/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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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가자NGO(행동하는복지연합 양준석 사무국장).pdf |
조회 | 1629 |
[함께가자&GO] 짜이를 끓이는 남자ㅣ양준석
“대학에 오자마자 명지대에서 강경대가 죽고, 독재에 저항하는 죽음의 행렬이 이어졌습니다. 2학년 마칠 때까지 정신없이 아스팔트 위에서 보냈어요. 군 제대하고 1995년 복학해서는 공부 좀 해보려고 했어요. 그런데 이듬해 연세대 사태 때 학생회 간부들이 다 잡혀 들어갔어요. 임시로 총학생회에서 일한다는 것이 1997년도 총학생회장까지 맡게 됐습니다.”
양 국장은 그러면서도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에 빠졌었다고 한다. 1990년대 말은 부문운동이 분화되는 시점이었다. 마침 총학생회 문예부장이던 후배가 사회복지 전공이었고, 그의 영향으로 사회복지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다. 대학 졸업 후에는 자원봉사자로 일하며 세미나도 다녔다. 1999년부터는 충북참여자치시민연대 사회복지위원회에서 시민운동을 시작했다. 2000년에는 16대 총선 낙천낙선운동을 하면서 대중운동에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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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개월의 인도 체험은 양 국장을 결단하게 만들었다. 2003년 7월부터 이듬해 7월까지 산남복지관에서 실무자로 일하는 값진 체험의 시간을 갖게 된 것이다. 관장인 최정묵 신부의 권유에 따른 것이었다. 사실 ‘애국적 사회진출’이라는 고민 속에서 사회복지의 길에 들어섰지만 그는 자격증도 없고, 현장도 몰랐다. 그런 수군거림을 들어오던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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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연대에 들어갈 때부터 복지운동에 대한 지향을 갖고 있었던 것이잖아요. 다만 참여연대 내부에서 할 것인가, 아니면 별개의 단체를 만들 것인지를 고민했던 것이죠. 결국 내부논의를 거친 끝에 사무실을 독립하게 됐습니다.” 2005년 2월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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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예비사무실을 냈고 6월 22일 행복연을 창립했다. 시작은 더부살이였다. 청주시 흥덕구 사직동에 있는 실업극복협의회 사무실 한 구석에 책상 하나와 컴퓨터 한 대를 놓고 시작했다. 그나마도 최정묵 신부가 ‘컴퓨터는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며 돈을 쥐어줘서 마련한 것이었다. 행동하는 복지연합이라는 이름을 정하는데도 세바그람의 방식을 적용했던 것 같다. “믿기지 않을 거예요. 핵심 멤버들이 모여서 12시간 동안 머리를 맞대서 지은 이름이에요.” 행복카페 중앙에는 실제로 커다란 행복나무가 있다. 뿌리는 구성원들의 심장속에 있다. 그래서 늘 무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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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적 복지는 직접 서비스입니다. 80% 이상이 이 틀을 벗어나지 못하죠. 배고픈 사람에게 밥을 주고, 아픈 사람을 병원으로 데리고 가는 겁니다.” 사실 그거면 되지 않을까? 그것마저도 국민을 만족시키지 못하고, 국민 대다수가 보편적 복지를 퍼주기라고 손가락질하는 나라가 아닌가. 도대체 거시적복지는 뭐냐고 물었다. 양 국장은 이에 대해 정부나 지방정부의 복지예산을 분석하는 것과 역동적인 복지주체를 훈련시키는 일이라고 요약해서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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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모든 종교가 좋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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